인민군 vs 미군

 

①. 6. 25 한국전쟁 기간 중 인민군 최고의 무기는 T-34/85 소련제 탱크였다.

T-34/85

85mm 주포를 장착한 이 탱크는 6.25 전쟁 시 국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국군이 가진 2.35인치 바주카포를 튕겨 내는 무시무시한 전차였다. 60도 경사 장갑에 전면 90mm 측면 20mm 보호 장갑을 가지고 있었다. 1950년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미 육군 스미스 부대와의 전투에서 16발의 M-9(2.35인치) 바주카포의 피탄을 받고도 끄덕 없이 전진한 기록이 있다.

미군 M-9 바주카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대구경 바주카포 M-20 (3.5인치 바주카포)가 등장하기 전까지 대인 화기로서는 격파가 불 가능하였다. 대전지구 전투(금강 방어선 전투)에서 미군이 긴급 공수한 M-24 채피 경전차와 M-4 A3 셔먼 전차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1대 7의 교환비를 보였음). 1950년 8월 낙동강에서 진정한 상대인 M-26 퍼싱 중전차를 만나 용형호제의 결전을 하게 된다. 이런 강력한 T-34 전차도 미군의 콜세어 공격기의 20mm 기관포에 탱크 포탑(turret)은 구멍이 날 정도로 취약했다. 6.25 전쟁 기간 중 대부분의 T-34는 미 공군의 폭격에 의해 피격됨. 

피격된 T-34/85

 

②. 미군 M-9, M-20 바주카

M-9(2.36인치) 바주카, M-20(3.5인치) 바주카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군에게 양도한 M-9 바주카포는 이후 미군 스미스 부대가 오산 전투에서도 사용하면서 전차 공격 무기로서 부족함을 보여 주었다. 이후 M-20 3.5인치 바주카가 등장하면서 대전차 무기로 유용성을 발휘하였지만. 발사 후 위치 노출의 위험 등 탱크를 막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무기였다.

 

③. 미군의 탱크들 (채피, 셔먼, 퍼싱)

M-4A3 셔먼 탱크
M-24 채피 전차

미군 전차 채피는 75mm 주포를 장착한 전면 장갑 38mm의 순찰용 경 전차이다. 이 전차들은 장갑 보호능력이 부족하여, 인민군의 37mm 대공포에도 관통당하는 치욕을 당하고 이후 정찰용으로만 사용되었다. M4 A3 셔먼 전차도 76 mm주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T-34와의 금강지구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피격되어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도 보병 지원용으로 사용되었다. 미군의 주력 전차는 미 본토에서 본격적으로 이송된 M-26 퍼싱 전차였다. 

M-26 퍼싱

퍼싱 전차는 90mm 전차포를 장착해 T-34/85의 85mm 전차포에 비하여 화력이 우세할 뿐 아니라 전면 장갑 110mm 측면 25mm 장갑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인민군 탱크를 압도하였다. M-26 퍼싱의 등장 이후 적군의 탱크 우위는 사라졌다. 

 

④. 인민군과 미군의 야포

개전 초 인민군은 김무정 장군의 포병 사령부를 만들 정도로 1,100여 문의 야포를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아 450여 문의 대포를 보유한 국군에 비하여 수적, 질적면에서 앞도적인 우위를 차지하였다. 

 

소련제 M-1927 다 목적포

M-1927 야전포

76.2mm 곡사포로 대 보병 지원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국군의 M3 105mm 곡사포와 유사한 야포로서 6.25 전쟁에서 북한 주력 다 목적포였다. 무게가 가볍고, 이동이 편리하여 북한 인민군들이 고지전을 할 때면 바퀴를 제거한 상태에서 진지 벙커에 설치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소련제 M-1942 대전차포

M-1942 대전차포

소련군이 이차대전시 독일 탱크 저지용으로 개발된 45mm 구경의 대전차 포. 북한은 M-1942 대전차 포를 보병 지원용 포로 사용하였다. 구경이 작아 폭발력은 약하였으나, 분당 15~20발을 발사하는 고속 발사력은 탁월하였고, 잔고장이 적어 대인 살상용으로 아주 많이 사용되었으며, 국군은 이 포로 인하여 돌격전에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었다.

 

소련제 82mm 박격포(mortar)

82mm 박격포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익숙한 포가 바로 82mm 박격포(mortar)였다. 조작이 간단하고 보병이 직접 분해, 조립, 이동이 가능하여 어떠한 지형에서도 사용이 가능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 게릴라전에서 자주 사용하여 익숙한 박격포로서, 인명 살상에 있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이 6.25 전쟁 초기 보유하고 있었던 최고의 야포는 M3 105mm 야포가 고작이었다.

M3-105mm 곡사포

정규 105mm 곡사포(howitzer) M2 105mm의 공수 부대용으로 개발된 포신이 짧은 변형 곡사포. 같은 105mm 포탄(shell)을 사용하고도 유효사거리가 정규포의 1/2 정도인 6.5Km에 불구하였다. 

이런 야포의 숫자와 질적인 부분에서  전쟁 초기 열세였지만 미군이 본격적으로 물자를 공수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미군 M114-155mm 곡사포

M114-155mm 곡사포
낙동강 전선 155mm 곡사포

6.25 동란 기간 중 미군의 주력 곡사포이다. M114 155mm 곡사포는 다양한 포탄을 사용할 수 있어 효율적이고, 유효 사거리 14~19km로 전쟁 중 최강의 대포였다. 휴전 회담 전후로 중부 전선 고지전의 경우 155mm 곡사포로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 외 M2-105mm 곡사포 등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때부터 화력과 숫자에서 미군과 연합군이 북한군을 압도하였다.

 

⑤. 한국군 유일의 장갑차량

 

6.25 전쟁 발발 시 국군의 탱크가 전무하였으나 장갑 차량은 27대 정도 미국으로부터 양도받아 사용하였다. 그 차종은 M8 그레이 하운드였다.

M8 그레이 하운드

37mm 전차포와 12.7mm 기관총 1정, 7.62mm 기관총 1정을 구비한 정찰용 장갑차로써 미군이 철수하면서 국군에게 27대를 제공한 것을 특별 기갑연대에 배치하여 운용하였다 전쟁 발발하자 T-34와 교전 명령을 받고 거의 전멸하였다.  전면 장갑이 19mm에 불과하여 중 기관총에도 관통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⑥. 미 해병대의 영원한 친구. F4U 콜세어.

출격하는 F4U 콜세어

이차대전 중 만들어진 프로펠러 전투기로서 6.25 전쟁 당시 이미 제트기인 F-86 세이버와 Mig-15기에게 공중 전투기의 자리를 내주었지만 재 공권을 미군이 잡은 상태에서 보병 지원 공격기로서의 역량은 탁월하였다. 콜세어는 본체(fuselage) 센터에 900kg 폭탄을 장착하고 양 날개에 12.7mm 기관총 4정, 20mm 기관포 4문, 8쌍의 로켓 발사기 장착 및 공격용 드롭 탱크(네이팜탄 원류)등을 장착하였다. 이런 공격력은 T-34를 고양이 앞에 쥐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⑦. B-29 Superfortress

B-29 폭격기
B-29 융단 폭격

평양과 주요 폭격 목표에 융단폭격(carpet bombing)을 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폭격기. 9000kg의 폭탄을 장착할 수 있고 10,000m 상공에서 작전이 가능하여 지상 대공 화기로는 요격할 수가 없었다. 1950년 10월 평양 대폭격에 8대의 B-29 폭격기가 출격하여 평양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당시 평양 방어 사령관 김책은 지하 벙커에서 지휘하다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B-29의 만주 보급창 폭격을 요구하였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원하지 않아 폭격을 허가하지 않았다. 만일 폭격을 했다면,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만주가 포격당했다면 우리 군은 조선 반도에서 철수하였을 것이다."라는 말을 회고록에 남겼을 정도로 6.25 전쟁 최강의 무기였다.

 

⑧. 항공모함(aircraft carrier)

동해 작전수역으로 이동 중인 항공모함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전투기

1945년 이차 대전이 종전된 이후 미군의 군축에 따라 탱크 등 지상용 무기들은 퇴출을 하였지만 미군의 항공모함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련이나 중국의 해군력은 미국을 견제할 수준이 되지 못하였어 동해에서의 작전 시 전혀 간섭을 받지 않고 출격을 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정규 항공모함 4대와 경 항공모함 3대를 동해로 급파해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정규 항모는 80대 항공기를 출격시킬 수 있고, 경 항모는 33대의 전투기를 출격 가능하였으니 북한 인민군, 만주 중공군이 보유한 항공기 대수보다 많았다. 아군의 지원 요청이 있으면 날씨의 문제만 없으면 언제나, 어디로나 공격이 가능한 6.25 전쟁 최강의 무기였다.

 

영어공부 합시다.

(전쟁 무기를 다루다 보니 이번 블로그에서는 이전 단어의 반복을 하고자 합니다.)

 

1. 곡사포 

   Howitzer

2. 박격포

   Mortar

3. 대공포

   Fl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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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민군 vs 대한민국 국경 수비대

우리나라는 참 특이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 옆에 있으면서 가장 중국을 무시한다. "중국 땐 놈", 일본을 "일본 쪽발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한국인의 자부심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뛰어나다. 객관적인 영토의 크기나, 인구에 있어 부족함에도 우리는 한국에 대한 무한의 신뢰를 보낸다.

이런 자부심을 가진 민족이지만 전 세계의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19세기 후반의 서구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에 편승하지 못해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고, 일본이 이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승전국인 소련과 미국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며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ideology) 전쟁의 최전선(front line)이 되었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내재된 위험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라는 이름으로 1,500,000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전 산업 시설의 폐허화되는 피해를 입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국내 정치 지도자들은 좌. 우익의 격심한 대립을 겪으면서. 미국과 소련의 이념 전쟁의 최 전선이 되고, 1949년 10월 중국 본토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중국 국경 주변으로의 공산 세력 확대 전략을 수립하던 스탈린에게 북한 김일성은 남침 계획의 승인을 요청한다. 중공 모택동의 동의를 얻은 스탈린은 최종 승인을 하면서 북한에게 남침을 위한 T-34 탱크 242대와 1,100여 문의 야전포 등의 무기 지원과 군사 고문단을 통한 북한 인민군의 전술 지원을 강화한다. 중공은 국공내전을 통하여 게릴라전에 익숙한 팔로군내 조선 의용군 5만 명과 포병 사령관 출신의 김무정을 중심으로 방호산 등 실전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 다수를 북한 인민군에 편입시킨다.

팔로군 포병 사령관 김무정
팔로군 166사단장 방호산

지난 10여 년간 국공내전, 일본군과의 중. 일 전쟁 경험을 갖춘 팔로군 출신 인민군들은 당시 아시아 최고의 보병 병력이었다. 1950년 5월 북한 인민군은 12개의 정규 사단을 편성하고 소련 88 여단 출신 류경수가 지휘하는 1개의 T-34 탱크 여단과 1,100여 문의 야포로 무장한 포병 사령부 등 전쟁 준비를 마쳤다. 

인민군 105탱크 여단장 류경수

반면 한국군은 실전 경험이 전무한 국경 수비대 형태의 군대 수준을 유지하다가, 1949년 9월 미군의 완전한 철수가 이루어지면서 겨우 6만여 명의 6개 사단 1개 연대의 군 편성을 가지고 있었다. 더 한심한 것은 국방장관 신성모나 국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미군의 태평양 사령부가 동경에 위치해 있고, 김일성은 북조선 체제 유지에 여념이 없어 전쟁은 불 가능하다.", "북한 괴뢰군이 침범하면 바로 북진을 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고, 북진 통일을 이룰 수 있다."라고 대통령에게 보고를 할 정도로 세계정세에 너무나 어두웠으며, 허풍만 치는 한심한 장군(똥별들, 지금도 이런 장군들이 많은 것 같은데 걱정스럽습니다.)들이 군 수뇌부의 대부분이었다. 

국경수비대 창설시대 국군 장병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위 38도 선 서쪽 옹진반도부터 동쪽 양양군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포격을 시작으로 남침하였다. 남침이 개시되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된다. 물론 동부전선 춘천의 국군 6사단은 북한군 2개 사단을 맞아 춘천을 이틀 동안이나 훌륭하게 방어했지만 전 전선에 걸친 인민군의 거침없는 진격에 춘천만 고립될 지경에 이르자 철수하게 된다. 남침 과정에서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은 한국판 전격전을 구사하여 개성을 반나절 만에 점령하고 다음날 김포까지 진격을 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1950년 6월 28일 류경수의 105 탱크 여단을 앞세운 인민군은 서울시를 점령한다.

서울에 입성하는 인민군 탱크들

철저한 준비를 갖춘 북한 인민군의 파죽지세 남침에 속절없이 당하며 한강 전선까지 돌파당하자 1950년 7월 1일 맥아더 사령부는 인민군의 남침 속도를 늦추기 위해 미군 24사단 소속 스미스 대대(battalion)를 특별 임무부대(Task force)로 편성하여 경기도 오산에 투입한다. 미군들은 미군의 투입 사실만으로도 북한 인민군은 전투를 멈출 것이라고 자만하였지만 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미군들은 6.25 전쟁 전반기 최강의(invincible) 무기인 T-34/85의 위력을 실감한다. 7월 24일 미군 24 사단은 금강 방어선의 핵심인 대전에서 인민군 3사단, 4사단, 류경수 105 탱크 여단을 만나면서 긴급 공수된 M-24 채피를 앞세워 금강 방어선을 사수하려고 하였으나 인민군 탱크 1대를 격파하는(본체 격파가 아닌 무한궤도 격파로 멈춤) 동안 미군 전차는 7대가 격파되는 대패를 당하면서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포로로 잡히고 만다. 막강한 독일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싸운 이차 대전에서도 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사단 깃발을 적군에게 뺏긴 적이 없는 미군에게는 치욕의 전투였다.(미 24 사단은 지금도 정식 사단기가 없는 부대로서 한국에 주둔하고 있으며 전쟁 발발 시, 사단 기를 찾아오는 것이 최우선 임무이다) 

진격하는 T-34/85 탱크
미군 M-24 채피(75mm 주포) 경전차
금강지구 전투에서 채피중대 전멸

맥아더 사령부는 딘 소장의 24 사단이 전멸하자 최종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 명령을 내리고, 패턴 장군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 "불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월튼 워커에게 낙동강 전선 방어 사령관 역할을 부여한다. 워커 중장은 하와이에서 파병된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27 연대의 보강을 받아 기존의 24, 25사단 미 기병 1사단의 병력으로 낙동강 700리 전선을 수호한다. 이차 대전 중 발지 전투에서 미 20 기갑 군단장을 역임한 워커 중장은 맥아더 사령부에 즉각적인 M-26 퍼싱 전차의 보급을 요청하고 미 제7함대에 탱크 공격기로 F4U 콜세어(corsair)의 출격을 요청하면서 낙동강 전선은 인민군과 연합군의 목숨을 건 전선이 된다. 

낙동간 전선
M-26 퍼싱 중전차
미 7함대 콜세어 지상 공격기

당시 미 국방성은 낙동강 전선의 위험성을 근거로(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미군의 후퇴가 힘들어 많은 포로가 양산될 수 있다.) 미군과 연합군의 일본으로의 후퇴를 계획하였다.(한국의 민간인과 정부 주요 요인 등은 태평양 서사모아로 이주시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음) 이런 상황에서 워커 중장은 낙동강 전선 수호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연락기를 타고 직접 낙동강 전선을 시찰하면서 구체적인 연대 전술을 지휘할 만큼 인민군 주력 부대의 낙동강 돌파 작전을 저지하는 최전선 지휘관 역할을 하였다.

워커 중장은 대표적인 전투인 다부동 전투와 진동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맥아더 장군의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할 수 있게 하였다. 그가 다부동 전투에서 연합군을 지휘하면서 남긴 'Stand or Die(전선을 사수하거나 아니면 죽음뿐이다)"는 그의 전선 사수 의지를 남긴 명언이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다. 인천 상륙 작전의 일등 공신은 워커 중장이 이끄는 낙동강 방어 사령부가 인민군 주력 사단을 전선에 묶어둠으로써 맥아더의 상륙 부대는 성공적인 서울 수복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 3사단을 선두로 38선을 통과하여 북진하게 된다. 10월 10일에는 원산,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며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날 것 같았다. 

월터 워커 중장
인천 상륙작전 맥아더 장군
중앙청 수복

영어공부 합시다.

 

1. ideology

"사상, 관념(학)"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idea" + "logy"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 (머릿속에 있는 관념에서 만들어진다)을 연구하는 학문. 이 발음은 독일어에서 일본이 받아 드리며 '이데올로기"라는 발음을 받아 드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도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2. corsair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영어 단어 "pirate'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3. stand or die

가정법 의미가 사용된 문구이다. 명령문 and(or) 명령문 구조. "~해라 그러면(아니면) ~이다(된다)."의 의미이다. stand는 여기서 지키다, 사수하다의 의미이다. 직역하면 "전선을 사수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다." 워커 중장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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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분단

 

베트남 전쟁 블로그를 준비하면서, 베트남의 분단과 공산화 과정 중 우리나라와 비슷한 부분이 매우 많아 6.25 한국 전쟁과 한반도 분단의 재조명 블로그 작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도시를 폐허화(devastate) 시키고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일본 군부는 천황의 안위 등을 조건으로 걸면서 미군에게 항복협상을 제의하였다. 미군은 8월 9일 나가사키에 또 한 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며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자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 14일 무조건적인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발표한다.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의 항복이 곧 이루어질 것을 안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소련 극동군을 투입한다. 8월 11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주둔  태평양 함대와 함께 소련 25군이 청진, 나남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8월 20일 일본군 사령부를 점령한다.

만주에 주둔해 있던 관동군과 일본인들의 피난민이 청진과, 부산으로 몰려들고 원폭 투하 소식을 접한 조선 총독, 아베 노보유키는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해 조선 주둔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들의 안전한 본국 송환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 내 정치 집단과 만남을 갖는데 이때 만난 사람이 여운형이다.

여운형 과 김구

당시 한반도의 지식인 집단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자 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조직이 여운형이 1944년 비밀리에 조직한 조선 건국동맹이다 (베트남 호찌민이 조직한 베트남 독립동맹과 이름까지도 유사합니다). 조선 건국동맹의 주요 구성원은 공산주의자 이강국,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자 출신 조동호, 신간회 좌익 계열 박상희(박정희 대통령 형), 황태성, 목포 지부장 김대중(이후 대통령)등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 총독과의 회담으로 1945년 8월 9일부터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여 전국 면 단위까지 치안, 행정 업무 접수에 들어가게 된다.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우익계열, 송진우, 김병로, 이인 등에게 동참을 요구했지만 거절 또는 대립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조선 공산당 박헌영의 참가로 건준은 공산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게 되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재미 독립협회 이승만 등의 세력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정통성이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건준은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더 이상 좌. 우 합작 연합정치집단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해방 후, 한반도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나누어져 분단되는 과정은 국내의 좌. 우익의 노선투쟁으로 발생한 것뿐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들의 체제 확산 세계화 전략의 결과였다.

소련군은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 이후, 파죽지세로 원산, 평양을 점령하고 9월 초 개성까지 점령하자, 서울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제17방면군 사령관 요시오 고즈키 중장은 일본 동경에 위치한 맥아더 사령부에 긴급 타전을 한다. "조선 주둔군의 무장해제(disarming)를 위한 미군의 조속한 서울 진입이 요구된다." 이 소식을 접한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 24 군단장 존 리드 하지 중장을 9월 7일 인천으로 급파하여 9월 9일 서울에서 일본군 제17방면군의 항복을 정식으로 받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선언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고, 미 제24군이 한국을 점령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선언하고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에게 행정권을 이관하기 까지 군정을 실시했다. 

미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
이승만 대통령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북조선 김일성과 공산주의 정권은 남쪽의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 공산당과 연합하여 주요 정치인 테러, 암살을 통하여 송진우, 여운형, 김구 등 많은 사람이 암살(assasination) 하였고, 용산 철도청 파업, 정판사 위폐사건, 대구 사태(박상희 사망), 4.3 제주 사태, 여수, 순천 국군 항명 사태 등 많은 공산 혁명활동을 진행하였지만 남한의 공산화에는 실패하게 된다.(베트남은 성공적으로 남 베트남내에 민족 해방전선을 구축하였다) 특히 1949년 모택동이 중국 본토를 공산화시킨 이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차례로 공산화시켰지만 철의 장막(iron curtain)에서 죽의 장막(Bamboo curtain)까지, 동유럽, 아시아 국가의 공산혁명을 직, 간접으로 지원한 국가들 중 실패한 유일한 국가가 대한민국입니다.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도 미국과의 회담을 통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하면서 북조선 내부의 조만식 등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선언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고 소련의 공산주의 이론을 북조선에서 실현할 수 있는 친소파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노동당 정권에게 정권을 이양함으로써 남과 북에는 서로 다른 이념의 정권이 각각 집권하게 된다.

북조선 김일성

38도선 이북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김정은이 할아버지)은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로 북한 대중 앞에 나타나자 북한 대중이 생각한 백발의 노련한 독립 운동가 김일성 장군과는 너무 차이 나는 33세의 애송이 김일성을 보고 가짜 김일성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런 북한 내 기반이 전혀 없었던 김일성이 북한 내 지도자로 선택된 것은 소련 스탈린의 유명한 말 "소련의 빵을 먹어본 인물이 북한을 통치해야 된다."에서 보듯이 전적으로 소련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동독에서 북한까지 공산세력 최대 영토

38도선 이남에서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 여러 인물이 경쟁을 하였다. 그중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하였고 상해 임시정부 통령도 역임하면서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많이 받는 인물로서 1948년 실시한 대한민국 최초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물론 미국의 입장에서도 가장 미국을 잘 아는 인물인 이승만 정부가 남한에서 합법적인 정권으로 탄생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운형, 김구, 김규식 등 반대 진영의 견제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의 탄생은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승만 박사(프린스턴 Ph.D)는 지난 40여 년간의 독립 투쟁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허구성과 종파 성을 많이 경험하였고. 이차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체제의 갈등을 간파하여 미국 중심의 통일 한국을 만들어야 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김구, 김규식은 독립 운동가로서는 적합하였을지 몰라도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가로서는 세계의 흐름을 너무도 몰랐다. 그들의 바람처럼 남한 단독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김일성, 박헌영과의 남. 북 공동 선거를 위하여 몇 년을 협상으로 보냈다면 대한민국은 탄생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영어공부 합시다!

 

1. Iron/bamboo curtain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연설에서 유래된 "철의 장막"이라는 단어이다. 소련의 스탈린(강철이라는 의미)의 이르에서 유래된 동유럽 소련 위성국들의 경계를 의미하며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중국과 그 위성국들을 합쳐 "죽의 장막"(bamboo curtain)이라는 단어도 이후 사용된다.

2. unconditional

"무 조건"이라는 의미이다. 부정 접두사 un-이 들어간 대표적 단어. 전쟁에서 항복할 때 패배자의 요구 사항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때 많이 사용한다.

3. Ph. D.

박사 학위라는 의미이다. Doctor of Philosophy의 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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