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ls

6.25 한국 전쟁을 미국의 역사 학자들은 Forgotten War (잊어버린 전쟁)라고 명명한다. 왜 6.25 전쟁을 이렇게 명명하는가? 해답은 분명히 모든 전력면에서 우세하고,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휴전이라는 명칭으로 중지한 미국 역사에서 처음이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려는 미국인의 관점이 반영된 표현인 듯하다.

미국 정치가들과 미 국방성 고급관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머나먼 아시아 대륙 끝에 붙어있는 캘리포니아 주의 1/4 크기인 South Korea 때문에 중공과 소련이라는 공산국가들과 세계 대전을 치를 수는 없고, 또 백번 양보해 공산주의 국가들이 미국의 최종적으로 박멸해야 될 적이라 할지라도 이제 막 이차 대전을 마치고 미국 최고의 번영기를 누리는 1950년에는 전쟁의 확전을 원하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힘없는 나라는 원래 이런 취급 당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도 여러 명장들과 똥별들은 주연과 조연으로 6.25 전쟁이라는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 내었다. 이번 블로그에서는 이들의 활약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①. Douglas MacArthur (맥아더 장군)

6.25 전쟁의 장군들을 다루는 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명장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더글라스 맥아더 Marshal(원수)이다.

맥아더 원수(Field Marshal)

맥아더 장군은 명문 군인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미 육군 예비역 중장으로 필리핀 주둔 총독을 역임한 군인이었다. 맥아더 장군을 평가할 때 거만하다(arrogant)는 평이 많은데 그는 가식적이거나 이중적인 행위를 보면 대놓고 지적하고 비판을 해 동기들 사이에도 잘난 채 하고, 자기 혼자 고고한 척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친절과 예의를 베푸는 성격이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는 굉장히 친밀함을 보였으며,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하버드, 프린스턴 박사 학위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그의 공산주의 박멸론에 많은 동감을 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역대 정치가 중 가장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정치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

 

맥아더 장군은 미국 육군의 역사적인 타이틀을 많이 가지고 있다. 미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여 평균 98점(100점 만점)의 성적으로, class 1903 수석 졸업을 한다.(미 육사는 기수로 칭하지 않고 졸업 연도로 표시함) 이 기록은 220년 미국 육군사관학교 역사에서 3번째로 높은 졸업 성적이었다.

1917년 프랑스 전선에서 대령으로 참전 함.(배우 그레고리 펙 닮음)

1917년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여 15개의 무공 훈장을 받으며 (미군 최고 기록) 1918년 11월 39세에 미국 육군 최연소 Brigadier Gemeral(준장)으로 미 육군 제42사단 장으로 진급한다.(미 육군 최 연소 사단 장 기록) 맥아더는 프랑스 전선에서 세계 최강의 독일 육군의 독가스 공격을 직접 받아 부상을 입으면서도 승리를 이끈 지휘관이었다. 이차 세계 대전에서는 일본 육군의 콰달카날 전투를 최종 지휘하면서(당시 태평양 지구 사령관이라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음) Skip and Jump 전략(적의 강력한 방어선은 뛰어넘어 보급선을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필리핀 상륙을 감행하여 일본 남방 사령부를 박살 내었다. 이 전투들에서 미군의 상륙 작전 교본이 완성된다. 1945년 9월 미 해군 전함, 미조리 함상에서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일본의 항복 문서 서명을 직접 받아내고 일본 동경에서 전후 일본의 새로운 미국식 민주주의 체계를 만드는 집정관 역할을 수행하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flamboyant (화려한) 기록의 소유자 중 한 명이다.

 

1950년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공군, 소련군(군사 고문단 포함), 미군, 연합군 등 1백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이 좁은 한반도에서 피 튀기는 전투를 하면서 수백 명의 장군들이 참전하였지만 이 모두를 통틀어 세계 최대 강대국들과 싸운 1, 2차 세계 대전을 직접 경험하고 지휘한 맥아더 장군 만한 경력자는 없을 것이다.(북한 괴뢰군 장군들의 빨치산 투쟁 경력은 마적단 수준의 전투 경험으로 항공모함을 이용한 폭격과 수백 문의 155mm 곡사포와 탱크 사단의 기동전 경험은 전무한 상태였으며, 그나마 전투 경험을 말할 때 북한 괴뢰군의 선전에 자주 인용되는 남일 장군이라는 인물도 고작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초급 장교에 불가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맥아더 장군과 비교하려면 주코프 장군 정도는 되어야 명함을 낼 수 있는 수준 아닌가!)

 

맥아더 장군의 6.25 전쟁 최고의 업적은 이차 대전중 여러 상륙 작전을 성공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미 국방부에서 5000 대 1의 확률이라며 반대하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것이다. 적의 배후에 일격을 가하면서 수도 서울을 탈환하여 아군에게 심리적 승기(morale)를 전파하고 낙동강 전선의 보급로를 차단 함으로써 인민군의 주요 부대를 궤멸시키는 6.25 전쟁 최고의 승부수였다.

 

9.28 서울 수복 이후, 10월 1일 미 국방부의 북한 영토로 진격에 대하여 미적거리는 행동을 할 때에도 북진 통일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여 국군 3사단의 38선 돌파를 허락하였으며, 중공군 30만 명의 개입으로 전 전선에서 후퇴할 때에도 만주의 중공 보급창 폭격으로 전쟁을 끝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원폭에 대한 부분은 작전 계획 중 하나의 아이디어 수준이었고 맥아더 장군은 B-29 폭격기로도 충분히 만주 보급창을 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중공 인민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의 이후 진술 "미군이 만주 보급창을 폭격했다면 우리의 전쟁 수행은 불가능하였다."처럼 한반도 통일을 만들 수 있는 전쟁을 하기를 원한 육군 원수가 맥아더 장군이었다.

 

②. Walton Walker

미 8군 사령관으로 낙동강 전선을 지킨 미군 명장. 워커 중장은 미 육군 사관학교 class 1912를 졸업하고 일차 대전에 미 육군 5사단 보병 중대장으로 참전하였으며 이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패턴 장군 휘하의 20 군단장으로 독일 최강의 SS기갑 사단을 상대로 한 벌지 전투에 참여하는 등 당시 최고의 기갑 사단장 중 한 명이었다. 

월턴 워커 중장

6.25 전쟁이 발발 하자 맥아더 장군은 워커 중장을 미 8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한국군의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워커는 한국군과 함께 낙동강 전선의 사수를 표현하는 유명한 "Stand or Die"문구를 사용하면서 직접 연락기를 타고 전선을 진두지휘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을 당시 군사 용어로 "Walker Line"이라고 불려질 만큼 워커 장군은 낙동강 전선 사수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는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제2의 덩커크 철수나 바탄 철수 사태가 일어나 연합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그의 의지와 미 해군, 공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잘 이용하여 북한 인민군 주력 부대를 잘 막아 내었다. 이런 워커 장군의 선방 덕으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다. 

10월 1일 이후 북진하여 평양, 초산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청천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산악을 통한 중공군의 빠른 침투로 임진강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1950년 12월 23일 아들 Sam S. Walker 대위의 은성 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의정부로 이동 중 교통사고로 지금의 도봉역 근처에서 사망하였다. 근처에 있는 아차산을 대한민국 정부는 "Walker Hill"이라 명명하였고, 광진구에 있는 워커힐 호텔 역시 워커 장군의 성명에서 유래되었다. 워커 장군은 미국 국립묘지로 이송되면서 육군 대장으로 승진되었다. 그의 아들, Sam S. Walker도 이후 미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는데. 미 육군 역사상 부자(아버지와 아들) 간에 육군 대장을 역임한 장군은 워커 장군이 유일하다. 

 

③. 팽덕회 (중국명: 펑더화이)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6.25 전쟁에 참여한 중공군 장군. 중국 호남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9세부터 가장으로 막노동을 하다가 군대 입대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에서 동북지방(만주)에서 국민당 군을 몰아내고 1949년 중국 공산화를 시킨 주역이 되었다. 이런 뛰어난 야전 경험을 가진 팽덕회는 1950년 10월 25일 북한 신의주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6.25 전쟁에 참전한다.

김일성과 팽덕회

 팽덕회는 11월 중순까지 중공군에게 전면적인 교전을 회피하고 관찰만 하라고 하면서 미군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집중한다. "미군은 화력과 물량에서는 우세하지만 도보행군을 싫어하고 야간전투에 취약하며 공중지원에 너무 의존한다."는 미군의 장, 단점을 파악하고 야간에 공중 지원이 힘든 시간에 험준한 산악 지역을 이용한 매복,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미군과 연합군을 38도선 이남으로 후퇴시킨 중공군의 명장이다. 절대적인 화력과 공중지원의 약세 속에서, 보급과 물자 공급이 어려운 중공군을 이끌고 1951년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을 함락시켰다. 

6.25 전쟁 기간 중 북한 김일성의 무 계획적인 전쟁 진행에 대하여 극심한 대립을 하여 일설에는 김일성의 뺨을 때리며 "전쟁을 요행만 믿고 일으켰다."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1951년 중반 이후 한반도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이룰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전쟁의 휴전을 염두에 둔 소모전으로 이끌다가 1953년 7월 휴전 협정문에 중공군 대표로 서명하였다.

홍위병에 끌려가는 팽덕회 원수

휴전 후, 중국으로 귀국하여 항미원조 전쟁의 영웅 취급을 받으며 중공군 최초의 원수(Marshal) 계급을 받고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공의 일인 독재 체계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모택동의 홍위병들에게 조리 돌림을 당하면서 숙청되어 사망했다.  난세의 뛰어난 장군도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 유지에 방해가 되면 가차 없이 죽이는 것이 공산주의의 속성이다. 

 

영어 공부합시다.

 

1. Marshal  육군 원수 계급이다

 

2. stand or die 전선을 사수하지 못하면 죽음이다. 

 

3. amphibious 수륙 양용의 뜻이다. 상륙작전 차량을 amphibious vehicle이라 한다.

'영어공부 , Vocabul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전의 역사를 바꾼 항공모함 1.  (0) 2021.09.18
대한민국 육군내 스파이  (0) 2021.03.06
6.25 전쟁 과 휴전회담  (1) 2021.02.05
6.25 전쟁 주력무기  (0) 2021.01.30
이념전쟁의 비극. 6.25 동란  (0) 2021.01.27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