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민군 vs 대한민국 국경 수비대

우리나라는 참 특이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 옆에 있으면서 가장 중국을 무시한다. "중국 땐 놈", 일본을 "일본 쪽발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한국인의 자부심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뛰어나다. 객관적인 영토의 크기나, 인구에 있어 부족함에도 우리는 한국에 대한 무한의 신뢰를 보낸다.

이런 자부심을 가진 민족이지만 전 세계의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19세기 후반의 서구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에 편승하지 못해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고, 일본이 이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승전국인 소련과 미국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며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ideology) 전쟁의 최전선(front line)이 되었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내재된 위험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라는 이름으로 1,500,000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전 산업 시설의 폐허화되는 피해를 입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국내 정치 지도자들은 좌. 우익의 격심한 대립을 겪으면서. 미국과 소련의 이념 전쟁의 최 전선이 되고, 1949년 10월 중국 본토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중국 국경 주변으로의 공산 세력 확대 전략을 수립하던 스탈린에게 북한 김일성은 남침 계획의 승인을 요청한다. 중공 모택동의 동의를 얻은 스탈린은 최종 승인을 하면서 북한에게 남침을 위한 T-34 탱크 242대와 1,100여 문의 야전포 등의 무기 지원과 군사 고문단을 통한 북한 인민군의 전술 지원을 강화한다. 중공은 국공내전을 통하여 게릴라전에 익숙한 팔로군내 조선 의용군 5만 명과 포병 사령관 출신의 김무정을 중심으로 방호산 등 실전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 다수를 북한 인민군에 편입시킨다.

팔로군 포병 사령관 김무정
팔로군 166사단장 방호산

지난 10여 년간 국공내전, 일본군과의 중. 일 전쟁 경험을 갖춘 팔로군 출신 인민군들은 당시 아시아 최고의 보병 병력이었다. 1950년 5월 북한 인민군은 12개의 정규 사단을 편성하고 소련 88 여단 출신 류경수가 지휘하는 1개의 T-34 탱크 여단과 1,100여 문의 야포로 무장한 포병 사령부 등 전쟁 준비를 마쳤다. 

인민군 105탱크 여단장 류경수

반면 한국군은 실전 경험이 전무한 국경 수비대 형태의 군대 수준을 유지하다가, 1949년 9월 미군의 완전한 철수가 이루어지면서 겨우 6만여 명의 6개 사단 1개 연대의 군 편성을 가지고 있었다. 더 한심한 것은 국방장관 신성모나 국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미군의 태평양 사령부가 동경에 위치해 있고, 김일성은 북조선 체제 유지에 여념이 없어 전쟁은 불 가능하다.", "북한 괴뢰군이 침범하면 바로 북진을 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고, 북진 통일을 이룰 수 있다."라고 대통령에게 보고를 할 정도로 세계정세에 너무나 어두웠으며, 허풍만 치는 한심한 장군(똥별들, 지금도 이런 장군들이 많은 것 같은데 걱정스럽습니다.)들이 군 수뇌부의 대부분이었다. 

국경수비대 창설시대 국군 장병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위 38도 선 서쪽 옹진반도부터 동쪽 양양군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포격을 시작으로 남침하였다. 남침이 개시되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된다. 물론 동부전선 춘천의 국군 6사단은 북한군 2개 사단을 맞아 춘천을 이틀 동안이나 훌륭하게 방어했지만 전 전선에 걸친 인민군의 거침없는 진격에 춘천만 고립될 지경에 이르자 철수하게 된다. 남침 과정에서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은 한국판 전격전을 구사하여 개성을 반나절 만에 점령하고 다음날 김포까지 진격을 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1950년 6월 28일 류경수의 105 탱크 여단을 앞세운 인민군은 서울시를 점령한다.

서울에 입성하는 인민군 탱크들

철저한 준비를 갖춘 북한 인민군의 파죽지세 남침에 속절없이 당하며 한강 전선까지 돌파당하자 1950년 7월 1일 맥아더 사령부는 인민군의 남침 속도를 늦추기 위해 미군 24사단 소속 스미스 대대(battalion)를 특별 임무부대(Task force)로 편성하여 경기도 오산에 투입한다. 미군들은 미군의 투입 사실만으로도 북한 인민군은 전투를 멈출 것이라고 자만하였지만 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미군들은 6.25 전쟁 전반기 최강의(invincible) 무기인 T-34/85의 위력을 실감한다. 7월 24일 미군 24 사단은 금강 방어선의 핵심인 대전에서 인민군 3사단, 4사단, 류경수 105 탱크 여단을 만나면서 긴급 공수된 M-24 채피를 앞세워 금강 방어선을 사수하려고 하였으나 인민군 탱크 1대를 격파하는(본체 격파가 아닌 무한궤도 격파로 멈춤) 동안 미군 전차는 7대가 격파되는 대패를 당하면서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포로로 잡히고 만다. 막강한 독일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싸운 이차 대전에서도 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사단 깃발을 적군에게 뺏긴 적이 없는 미군에게는 치욕의 전투였다.(미 24 사단은 지금도 정식 사단기가 없는 부대로서 한국에 주둔하고 있으며 전쟁 발발 시, 사단 기를 찾아오는 것이 최우선 임무이다) 

진격하는 T-34/85 탱크
미군 M-24 채피(75mm 주포) 경전차
금강지구 전투에서 채피중대 전멸

맥아더 사령부는 딘 소장의 24 사단이 전멸하자 최종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 명령을 내리고, 패턴 장군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 "불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월튼 워커에게 낙동강 전선 방어 사령관 역할을 부여한다. 워커 중장은 하와이에서 파병된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27 연대의 보강을 받아 기존의 24, 25사단 미 기병 1사단의 병력으로 낙동강 700리 전선을 수호한다. 이차 대전 중 발지 전투에서 미 20 기갑 군단장을 역임한 워커 중장은 맥아더 사령부에 즉각적인 M-26 퍼싱 전차의 보급을 요청하고 미 제7함대에 탱크 공격기로 F4U 콜세어(corsair)의 출격을 요청하면서 낙동강 전선은 인민군과 연합군의 목숨을 건 전선이 된다. 

낙동간 전선
M-26 퍼싱 중전차
미 7함대 콜세어 지상 공격기

당시 미 국방성은 낙동강 전선의 위험성을 근거로(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미군의 후퇴가 힘들어 많은 포로가 양산될 수 있다.) 미군과 연합군의 일본으로의 후퇴를 계획하였다.(한국의 민간인과 정부 주요 요인 등은 태평양 서사모아로 이주시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음) 이런 상황에서 워커 중장은 낙동강 전선 수호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연락기를 타고 직접 낙동강 전선을 시찰하면서 구체적인 연대 전술을 지휘할 만큼 인민군 주력 부대의 낙동강 돌파 작전을 저지하는 최전선 지휘관 역할을 하였다.

워커 중장은 대표적인 전투인 다부동 전투와 진동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맥아더 장군의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할 수 있게 하였다. 그가 다부동 전투에서 연합군을 지휘하면서 남긴 'Stand or Die(전선을 사수하거나 아니면 죽음뿐이다)"는 그의 전선 사수 의지를 남긴 명언이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다. 인천 상륙 작전의 일등 공신은 워커 중장이 이끄는 낙동강 방어 사령부가 인민군 주력 사단을 전선에 묶어둠으로써 맥아더의 상륙 부대는 성공적인 서울 수복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 3사단을 선두로 38선을 통과하여 북진하게 된다. 10월 10일에는 원산,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며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날 것 같았다. 

월터 워커 중장
인천 상륙작전 맥아더 장군
중앙청 수복

영어공부 합시다.

 

1. ideology

"사상, 관념(학)"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idea" + "logy"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 (머릿속에 있는 관념에서 만들어진다)을 연구하는 학문. 이 발음은 독일어에서 일본이 받아 드리며 '이데올로기"라는 발음을 받아 드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도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2. corsair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영어 단어 "pirate'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3. stand or die

가정법 의미가 사용된 문구이다. 명령문 and(or) 명령문 구조. "~해라 그러면(아니면) ~이다(된다)."의 의미이다. stand는 여기서 지키다, 사수하다의 의미이다. 직역하면 "전선을 사수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다." 워커 중장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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