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 케산 전투.

 

1964년 이후 미군들의 월남전 파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호찌민은 남부 베트남 공산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모든 노력을 남 베트남 게릴라, 베트콩들의 지원에 집중하였다. 베트콩은 1967년까지 미군과 연합군이 진주해 있던 해안지대를 제외한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공산당 조직을 완성하고, 종교계, 학생들까지 포섭한 상태였다. 

베트콩들의 반 정부 데모와 외곽 밀림 지역에서의 국지적인 게릴라 전을 활발히 전개 하였지만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미군의 인력과 화력을 꺾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호찌민과 북 베트남 군 수뇌부는 미군의 전쟁 의지를 꺾는 결정적인 전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하여 프랑스군을 퇴패시키고 제네바 회담을 통하여 북 베트남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처럼, 북 베트남군과 미군 사이의 전면전의 시기와 지역을 고민하고 있었다. 작전을 구상하고 있을 때 남부 베트콩 수뇌부들의 1968년 베트남 구정(Tet)을 맞이하여 베트남 전역에 걸친 총공세 작전(Tet offensive) 계획을 수립하여 호찌민의 허락을 요청하였다. 북 베트남군은 베트콩의 구정 공세와 더불어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기로 결정한다.

어디를 공격 할 것인가? 미 해병대가 기지 방어를 수행하고 있는 비무장 지대 (D.M.Z.) 남쪽 외곽 케산 기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케산(khe sanh) 기지 위치
케산 기지 활주로와 주변 캠프

결정적 전투 (decisive battle)의 위치로 케산 기지를 결정한 이는 10여 년 전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 베트남 국방 장관 보능우엔 지압 장군이었다. 그는 케산 기지가 디엔비엔푸와 같은 3900피트 길이의 활주로를 가진 공중 지원 중심의 방어 기지로 주변 9번 국도를 장악하면 보급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케산은 우측 동트리 산과 서쪽의 800 m 이상의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북 베트남의 포대 배치가 용이하며 산악 기후로 안개와 비구름이 자주 끼여 적 공군기의 출격을 어렵게 하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북 베트남 근접 화기 배치도

케산 전투 60일 전에 북 베트남 군은 2개 사단 병력을 케산 기지 서북쪽 881m 고지 주변의 밀림에 박격포와 RPG, 소련제 76mm 야전포와 함께 배치하고 라오스 국경을 통과하는 2개의 새로운 보급 도로를(santa fe trail) 건설하였다. 디엔비엔푸 전투와는 달리 북 베트남 군은 트럭을 통한 소련제 130mm 야전 포도 라오스 국경 넘어 305 고지와 코 락에 배치하여 장거리 포격 지원 준비도 모두 갖추고 전투를 시작한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130mm 야전포
 북 베트남 장거리 포대

미군은 세계 최고의 공군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F-4 팬텀 전폭기,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B-52 전략 폭격기 등 북 베트남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하는 공군 전력이었다(no match for U.S Air Force).

특히 B-52 폭격기는 55,000 피트(17 km) 상공에서 한 번에 31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소위 융단 폭격(carpet bombing)을 할 수 있는 천하무적의 폭격기이다.

 

F-4 팬텀
A-4 스카이 호크
B-52 전략 폭격기

이런 막강한 공중 폭격 능력에도 북 베트남의 보급로를 파괴하지 못한 상태에서 1968년 1월 21일 북 베트남군의 무자비한 포격을 시작으로 케산 전투는 시작된다. 881 고지 주변에 위장된 상태의 포대는 미군의 정찰 비행과 공중 폭격에도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매일 수백 발에서 최대 1,300 발까지 미군 기지를 타격하였다. 포격과 그 후속 보병의 공격은 북 베트남군에게는 익숙한 전투 형태로 14년 전 디엔비엔푸 전투 방식과 동일하였다. 북 베트남군의 개인 무장은 훨씬 진보되어, AK-47 돌격 소총과 소련제 K-38 기관총, RPG-7등으로 무장하였고, 

 

북 베트남군 130mm 야전포
K-38 기관총
RPG-7

이런 진보된 개인 화기와 포대 지원에도 불구하고, 케산 전투에서의 북 베트남 군의 전진은 번번이 격퇴 되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미군 케산 기지의 벙커와 참호는 활주로 공사용 플레이트와 모래 포대, 시멘트로 작업을 하여 벙커의 경우 120mm 고사포의 직격탄에도 견디게 구축되어, 적 포격으로 위축되지 않았고. 근접 전투를 위해 돌격하는 연대(regiment) 규모의 병력들은 미 공군기의 네이팜탄 공격에 번번이 후퇴해야만 했다. 미 공군의 공습뿐 아니라 미군 포대의 장거리, 단거리 지원 포격도 공격하는 북 베트남군에게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하였다. 북 베트남은 304 사단을 투입하여 케산 서쪽 랑베이 기지를 점령하고 케산 기지 아래쪽 케산 마을도 점령한다. 케산 포위 작전의 동쪽 9번 국도 쪽으로는 북 베트남 324c 사단이 남하하여 점령 함으로써 캐산 기지는 육상으로의 지원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가 되었다. 이런 고립 상태에도 미군의 C-130, C-123 수송기, Ch-47 헬기 등을 통한 보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포격과 고립 작전에도 미군을 격퇴시킬 수 없자 북 베트남 군은 그들 특유의 땅굴 작전을 진행한다. 북 베트남 군은 케산 기지 남쪽과 남서쪽으로 수 십 Km의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땅굴을 파 들어가 케산 기지 1km 전방까지 도달하여 전면적인 돌격 작전을 감행하려는 순간, 미군은 미 공군 B-52 폭격의 융단 포격을 요청하였다. 

 

C-130 허큘리스 수송기
Ch-47 시누크 헬기
미군들 땅굴 탐지
네이팜탄
땅굴 작전

북 베트남 304사단 66 연대는 캐산 기자 남쪽 471 고지에서 땅굴을 파서 캐산 기지 전방 1Km까지 접근하여 공격 준비를 갖추자 미군은 땅굴 탐지와 파괴 작전을 진행 하지만 미군들이 땅굴 근처로 접근하면 여지없이 박격포와 야전포 포탄들이 날아와 번번이 실패하였다. 미군은 최후로 B-52의 근접 폭격을 요청하고, 3대의 전략 폭격기는 케산 기지 1km 근방에 융단 폭격을 가하자 북 베트남군의 땅굴 돌격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케산 전투 77일 만에 북베트남군은 D.M.Z 북쪽과 라오스 국경 쪽으로 철수하고 케산 기지의 고립(The siege of Khe Sanh)은 끝이 난다. 

 

케산기지 융단폭격

영어공부 합시다.

 

1. carpet bombing

"융단 폭격'이라는 의미이다. 융단이라는 의미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일상적인 집안에 까는 "carpet"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carpet bombing"하면 생각나는 B-52 폭격기에서 퍼붓는 폭탄들 현대 전쟁의 상징이다. 전쟁은 돈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낸 미국의 상징이다.

2. Tet offensive

"구정 공세(공격)"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베트남 전쟁의 대표 용어로 많이 언급된다. "Tet"는 베트남어로 구정, "Lunar New year"이다.

3. decisive

"결정적인"의 의미이다. 동사 "decide"(결정하다)에서 파생한 형용사이다. 어떤 사태를 전환시키는 큰 계기가 되는의 의미로서, "critical", "crucial"등의 단어와 유사한 의미가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유사어들을 모아 정리해두면 암기에 편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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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짜빈동 전투와 일본군의 operation masterdom

 

대한민국 파월 군인들은 정말 잘 싸웠습니다. 미군들과 베트남 군 등 연합군 병사들도 한국군이 관할하는 지역이 가장 안전하다고 할 만큼 대한민국 군인들은 자신이 맡은 지역 내에서는 베트콩들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전투 중 잡힌 북 베트남군 포로에게서 호찌민 작전 명령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한국군과의 교전은 피하라. 완전한 승리가 담보되지 않는 공격은 하지 말고 탐색에 집중하라."였다.

 

1945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 또는 베트 민 게릴라들을 완전히 격퇴할 수 있었던 2번의 기회가 있었다. 이 기회를 만든 주역은 일본 군과 한국 군이었다.

 

1945년 10월 부터 1946년 5월 영국 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제1차 베트남 전쟁에서 영국 군 휘하에 일본 군들은 베트 민 게릴라들을 캄보디아 정글 지역까지 완전히 밀어내고 2,700여 명의 게릴라를 사살하였다.(이전 블로그 참조) 일본 군은 밀림 전투에 익숙한 베테랑(veteran)을 중심으로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베트 민 게릴라들이 정글에 숨어서 매복 공격을 하여도,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정글의 지형을 이용하여 포위 섬멸 작전을 구사, 남부 베트 민 게릴라들을 전멸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레이시 영국 군 사령관이 요청한 후속 군수 물자 보급과 인력 보충이 되었다면 베트 민은 전멸되고, 베트남 공산 세력의 북 베트남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 존슨의 요청으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민국은 31만 2천여 명의 한국 군을 베트남에 파병하였다. 지원병을 중심으로 한 맹호, 청룡부대를 선두로, 년 인원 5만 명까지 파월되었다.

맹호 부대 마크
청룡 부대 마크

한국 군의 주요 지휘관과 선임 직업 하사관들 중에는 6.25 참전 군인들이 많았고, 반공 교육을 통한 공산당 섬멸이라는 대의명분은 한국 군의 전투 의식을 고양시키기에 적절하였다. 이런 군기(morale)를 가진 특수 부대(Special Force)들은 베트콩은 물론이고 북 베트남 정규군과의 교전에서 월등한 사상자 교환 비율(1:10.3)을 보여 주었다. 이런 개인 전투력의 우세보다 한국 군의 뛰어난 전과를 거둔 더 중요한 요인은 전투에 임하는 태도였다. 적의 매복 공격을 받으면 한국 군은 대응 사격을 하면서, 양 측면을 포위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공군 폭격이나 포병의 지원 사격을 요청하며 적이 땅굴로 대피하면 발견한 땅굴을 중심으로 다른 출입구를 찾아 봉쇄한 후, 최루탄을 질식할 정도로 투입하여 적 게릴라들이 튀어나오게 하여 두더지 잡기 하듯이 섬멸하였다. 이런 악착 같이 적을 잡겠다는 태도가 북 베트남 군이 한국 군과의 교전을 피하는 주요한 이유였다.

 

한국 군의 베트남 전쟁에서 거둔 가장 큰 승리는 짜빈동 전투이다. 

한국 해병대 1개 중대(company)가 북 베트남 군 1개 연대 병력과 맞붙어 물리친 대표적 전투였다.

 

한국 군도 초기 베트콩의 매복과 부비트랩에 많은 인명 손실을 입었지만 밀림 전투에 차츰 익숙해지면서

중대 기지 전술이라는 전술 기지를 구축하여 아군이 맡은 지역을 확실히 장악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짜빈동은 꽝나이(지도에서 다낭, 훼안, 탐키 다음 도시)에서 북서쪽으로 12 km 떨어진 조그만 마을이다. 이곳에 해병 2 여단 3 대대 11 중대가 중대 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1967년 2월 14일 오후 11시경 북 베트남 정규 군과 베트콩이 연합한 1개 연대 병력이 급습한다. 

 

짜빈동 전투

293명의 해병 11 중대는 중과 부족이었지만 구축한 중대 기지의 지형을 잘 활용하여 적을 기지 내로 유인한 이후 1 소대와 3 소대의 양측 협공 작전을 펼치면서, 기지 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육박 전까지 가는 새벽까지의 전투를 치러 적을 퇴각시킨다. 다음날 아군의 보충 병력들이 도착하여 수색을 하니 적 사망자 243명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아군 피해는 15명 전사, 33명 부상이었다. 완전한 대승이었다.

짜빈동 전투 이후 한국 군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면서 미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한국 군이 월남전을 전담한다면 이 전쟁은 조만간 끝낼 수 있을 것이다."는 평가 기사를 실었다. 

만일 매년 10억 달러의 지원을 하면서 한국 군 40만 이상의 병력이(년 간 기준) 파병되었다면 월남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에 미 해군의 공중 지원과 포병의 화력 지원을 그대로 받았다면 베트콩의 구찌터널 내의 총사령부뿐 아니라, 캄보디아의 호찌민 트레일도 박살이 나고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어공부 합시다.

1. veteran

'예비역 사병, 은퇴 군인, 노련가"의 의미이다. 전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이며 한국어에서도 외래어로 통용되는 단어인데 불어식 발음 '베테랑'으로 쓰이는데 영어식 발음에 익숙하면 좋을 듯합니다

2. noose

'올가미"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를 외울 때는 nose(코)의 구멍이 2개 "n oo se"걸기 쉽다. 올가미 이런 연결이 좋을 듯합니다.

3.prowl

"배회, 감시 선회"의 의미이다. 이 단어 암기 시 owl(올빼미)은 큰 두 눈을 가지고 밤에도 관찰한다. "pro-"접두사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으니 합쳐서 감시하며 배회한다는 의미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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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략적 실수

 

1954년 제네바 회담의 결과에 따라 북위 17도 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진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의 이념적 갈등의 최 전선이었다. 미국은 남 베트남이 공산화된다면 이웃 국가들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멀리 호주까지도 연속적으로 공산화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을 신봉하였고 이런 공산주의의 파급은 반드시 막아야 하는 당면 목표가 되었다. 남 베트남은 목표 달성을 위한 최 전선이었다. 1961년 미국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케네디 대통령은 남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막대한 군사, 경제 원조를-10억 달러 이상- 지원한다. 

 

특히 200,000명의 남 베트남 군 양성을 위하여 200여 대의 헬기 및 항공기를 지원하고 900여 명의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적극 협조하였다. 남 베트남의 딘지엠 정권은 오히려 이런 구호물자를 가지고 몇몇 인척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였고 절대다수 국민은 궁핍한 생활을 이어 갔다. 군부 역시 유능한 장교들이 승진하여 장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권과 연결된 일부 세력들이 군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면서 군인에게 지급되는 피복과 식량 심지어 미군의 무기들까지 빼돌려 베트콩에게 팔아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상황에서 굶주린 병사들(underfed soldiers)은 탈영(desertion)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대통령부터 일반 사병까지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아귀다툼을 하는 국가였다. 이런 정권에 비하여 북 베트남의 호찌민은 프랑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보 능우엔 지압 장군 같은 능력 있는 자를 군 사령관으로 발탁, 지지를 보내고 이런 지지 속에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서 북부 베트남의 주석으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였다. 

북부 베트남뿐 아니라, 남부 베트남의 일반 대중들도 호찌민을 민족의 지도자라고 찬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버린 것은 미국의 큰 실패의 근원이 되었다. 심리 전에서 벌써 남부의 부패한 지도자 따르지 않는 베트남 전쟁은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였다. 

1958년 이후 북부 베트남의 대남 공작은 강화된다. 1961년 N.L.F(National Liberation Front: 민족 해방 전선)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17,000여 명의 게릴라들이 활동하였지만 1964년 더 많은 남부 베트남 사람들이 동참하여 전국 14개 지부를 갖춘 200,000여 명의 군사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1964년부터 미국은 남부 베트남 군 단독으로는 베트콩 세력을 막아 낼 수 없다는 판단하에 미국 전투병력을 투입 하기 시작한다. 

미국 제36대 대통령이 된 존슨 대통령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우방국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여기에 호응하여 "공산당"과 직접적인 전투 경험을 갖춘 우리나라 청룡, 맹호부대들이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파병하게 된다.  

1964년 남부 베트남내의 200,000여만 명의 베트콩 총사령부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총사령부에는 주요 인력 들만 해도 3만 6천여 명이 거주하는 대단위 시설인데, 미군 정보대는 캄보디아 국경 밀림 지역이나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 지역일 것이라고 여러 첩보 등을 통하여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이 지역은 군사 훈련 캠프가 있었다) 전쟁 후 실질적인 사령부는 남부 수도 사이공 서북쪽 32km 밀림 지역, 일명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트콩 본부 철의 삼각지

어떻게 수도 바로 옆에 게릴라 총본부가 감시를 피하여 존재할 수 있었는가? 적이 코앞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1. 사이공을 제외한 외곽지역 주민은 모두 심정적으로 베트콩을 지지하고 있었다.

2.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게릴라 전술에 따라 수백 km의 땅굴을 마치 미로(maze)처럼 연결하여 미군의 공습과 도심 게릴라 전을 준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3. 일단 유사시 war zone C, D지역으로 땅굴 이동이 가능하여 감시, 정찰을 회피할 수 있는 장소이다.

4. 수도 사이공의 게릴라 인력 확보가 용이하고, 캄보디아 국경지대를 통한 북 베트남의 무기 및 여러 가지 보급이 용이하다.

1973년 미군들이 철수할 때까지 한 번도 베트콩 지도부를 파괴하지 못하고, 역으로 1968년 구정을 기하여 사이공을 중심으로 전국 100여 개 도시를 기습 공격하는 중심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사이공에는 6만여 명의 베트콩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할 정도로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후 미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게릴라들에 의해 미국 대사관이 점령되는 것을 본 미국은 "이런 무법 게릴라들이 수도까지 농락하는 나라를 왜 우리가 지켜야 되는가!"라는 반전 시민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여론은 미군 철수 쪽으로 기우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사이공의 처형

이 사진은 미국의 반전데모의 계기가 된  AP 기자가 촬영한 유명한 구정 공세의 한 장면이다. 권총으로 베트콩을 사살하는 사람은 국가 경찰국장이고 민간인 복장을 한 처형된 사람은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베트콩 대위 응우엔 반렙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당시 기자는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의심하여 거리에서 즉결 처형하였다고 베트남 정부의 무법 성을 폭로한다면서 대서특필하여 타임지에 실린 유명한 사진이다. 하지만 이 민간인은 베트콩 핵심 세력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가장 큰 실수는:

1. 베트남 인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개인의 정치적 야욕에 가득 찬 딘지엠 정권을 지지하고 이후 군사 쿠데타 세력 역시 호찌민 같은 대중적 지지와는 거리가 먼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다.

 

2. 정확한 적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베트콩 총본부조차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알지 못하였으니 어디로, 어느 정도 규모의 적을 공격해야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를 전선 없는 전쟁 또는 Area War(지역 전투)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콩은 항상 미군을 필요한 시간에 자신들의 매복 지역으로 끌어들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3. 베트콩은 원하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여 전투를 진행하였지만, 화력과 지원 포격이 확실한 미군이 1:5 정도의 사상자 비율로 항상 우세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매복 공격으로 시작하는 베트콩의 기습에 미군의 사상자가 항상 먼저 발생하고 미국의 메스 미디어들은 유혈이 낭자한 미군의 총상자들을 미국 텔레비전에 그대로 방송하니, 이를 본 미국민들은 "남의 나라를 위해 왜 미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야 하나!'는 반전의 분위기만 고조시켰다. 베트남 전쟁은 "미디어 전쟁"의 시작이었다. 

 

영어공부 합시다.

 

1. underfed

"영양부족의, 음식이 부족한"의 의미이다. 이 단어의 구성을 보면, "under"는 아래, 이하라는 의미이고, "fed"는 "feed"의 파생형. 즉 음식을 먹이는 것을 기준 이하로 하는 것이니 부족하다는 의미 유출이 가능하다

2.undeclare

"선언하지 않은, 선포하지 않은"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성이 간단하다. "declare"는 "선언하다"이다. 접두사 "un"은 부정의 접두사. 이 둘을 합치면 된다.

3. resounding

"울러 퍼지다, 확실하다"의 의미이다. "sound"는 소리가 울리다, 소리를 내다는 의미이다. "re"라는 접두사는 다시, 반복적인 의미가 있으니 소리가 돌고 돌아 나온다. 널리 퍼지 다는 의미가 되고 널리 퍼진 소리는 확실해진다. 이런 연결이면 충분. resounding은 형용사로 "확실한"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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