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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5 6.25 전쟁 과 휴전회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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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과 휴전회담
미완의 전쟁 6.25
1950년 10월 말 국군 6사단 7 연대는 압록강 초산에 도착하여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낼 정도로 한반도 통일은 정해진 일정 정도로 모두가 인식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하고 서울을 수복한 미군과 연합군은 38도선 이북으로 진격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중공의 주은례는 미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할 경우 중공은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UN을 통하여 경고한다. 미국은 맥아더 장군의 강력한 북진 의지에 가능한 빨리 압록강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일부 사가들은 이런 맥아더의 북진 계획은 대만 장개석 정권과 힘을 합쳐 중국 본토의 공산정권 축출 계획의 일부로서 맥아더는 전쟁광이라고 평가절하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6개월간의 김일성이 저지른 동족 상쟁의 전쟁으로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1백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은 상황에 대한 책임도 없이 다시 38도선에서 휴전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맥아더의 의지와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통일의지가 맞아 떨어져 1950년 10월 1일 북진을 개시한다.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말 육군 6 사단은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하였고, 11월 미군 7사단은 혜산을 점령하면서 이제 서부전선 신의주와 동부전선 두만강 지역만 점령하면 한국 전쟁은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10월 말부터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중공군 30만 명이 인민 지원군이라는 이름하에 북한 청천강 지역 산악 지대와 개마고원 주요 고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평양 점령 이후 압록강 유역으로 진격하자 중국 공산당은 소련과 김일성의 요청에 따른 파병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중공도 중국 본토를 공산화 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아 대규모 전투를 하기 어려운 입장이었지만 모택동의 순망치환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다) 론에 따라 한반도로 파병을 10월 중순에 결정한다. 미군의 중공 국경 접근은 잠재적으로 중공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완충 역할을 하는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붕괴를 좌시하지 않게 다는 모택동의 결정에 따라 중공은 이 전쟁을 항미원조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다) 전쟁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른 여건 속에서 11월 초 동부 전선은 480Km의 광범위한 지역에 해병 1사단 미 육군 7사단, 한국군 3사단, 영국 해군 특전단 등 단지 10여만 명의 병력으로 압록강 지역 장악을 독촉하다 보니 부대 간 간격이 넓어지고 특히 장전호 주변의 해발 1,000여 m가 넘는 험준한 산악 지형은 매복(ambush)을 당하기 좋은 지형인 것을 미군들도 알고 있었지만 서둘러 진격하였다.
중공 인민 지원군은 미군의 이런 무리한 진격을 지켜보면서 주요 고갯길 요충지를 장악하고 기습 매복 작전을 실시하여 개마고원 주변에 포진한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은 중대 단위로 고립되어 힘든 전투를 치르면서 흥남으로 집결, 철수하게 되는데 이 철수 작전이 흥남 철수이다.
30여만 명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 전선에서 철수가 이루어지고 수도 서울까지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맥아더 장군은 만주 폭격을 강력히 주장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의 확대로 인한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로 이를 불허하고, 맥아더를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을 연합군 사령관에 임명한다.
중공군 역시 미군의 우세한 화력과 공중지원 하에서는 한반도의 완전한 적화는 힘들다는 것을 간파하고 38도선 근처에서의 휴전(armistice)을 원하였다. 맥아더 후임 리지웨이 장군은 청천강 이북으로의 미 공군 폭격을 불허 함으로써 전쟁은 1951년에 접어들면서 정전으로 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가장 반대한 인물이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미군이 북진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면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미국에 통보하는 등 한반도의 제2 분단에 대하여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회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전쟁 포로 송환 작업이 진행되자 육군에 비밀 명령을 하달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반공 포로 석방을 진행 하였다. 포로수용소 내 공산주의자들과 자유민주주의 포로 간의 유혈 투쟁을 일으켜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 하에 포로수용소 내로 진입하면서 반공 포로들의 수용소 탈출을 묵인하였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폭동의 강제 진압 중 자유를 갈망하는 포로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를 선택하였다."는 답변으로 미군의 강제 송환을 막았다. 당시 연합군에 편성된 국군은 리지웨이 장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상태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라는 세계 최 강대국을 상대로 대한민국의 이익을 최대한 받아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국내 유일의 정치인이었다. 미국 정부는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국의 대한민국 안위 보장을 확약하면서 "한미 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을 60만 명으로 확대 강화하는 협약을 받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을 체결하게 된다.
한국민이 원하지 않았지만 냉전의 이데올로기(ideology)가 첨예하게 부딪치면서 일어난 3년간의 전쟁은 이렇게 한국민의 의향과는 관계없이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시키면서 끝이 났다.
영어공부 합시다.
1. ambush
매복(공격)을 의미한다.
2. armistice
휴전을 의미한다.
3. ideology
사상(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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