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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7 프랑스의 굴욕, 디엔비엔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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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굴욕, 디엔비엔푸 전투.
지압 장군의 디엔비엔푸 전투
베트남의 역사적 배경과 지정학적 위치가 대한민국과 너무나 유사하다. 두나라 모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일본의 항복 이후 소련, 중공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이념의 갈등의 무대가 되었으며 남북으로 갈라지는 운명 역시 동일하다.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베트남 독립 동맹(비엔 민) 세력은 남부 사이공에서 영국. 일본 연합세력에게 격퇴되었지만 북부 하노이 지역에서는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영국군이 철수하고 프랑스군은 남부 사이공 지역뿐 아니라 북부 하노이에 4개 사단 병력을 상륙시켜 하노이를 수복하였지만 호치민의 비엔 민 세력은 중공 국경, 산악 지역인 Viet Bac(비엔 백)을 완전히 장악하고 전국에 걸친 게릴라전을 진행하자 북부 하노이는 비엔 민 세력에 갇힌(enclave) 외로운 섬이 되었다. 비엔 민 세력의 확장은 베트남뿐 아니라 인접한 프랑스령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확장되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프랑스 본거지를 모두 위협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비엔 민의 게릴라 전으로 매년 5,000여 명의 병력 손실이 발생하고 비엔 민을 격퇴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몰리자 파리에서는 연일 데모가 일어나고 여론은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비엔 민은 1949년 10월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자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받아 120,000명의 정규군을 무장 훈련시키고 200,000명의 비 정규군 게릴라(Viet Cong) 세력도 확보하게 된다.. 호치민은 베트남 국내의 게릴라전뿐 아니라 라오스에 대한 게릴라전을 확대하며 라오스 공산당을 적극 지원하여 라오스 수도, 루앙 프라방 공격에 만전을 기하자, 프랑스는 베트 민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작전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디엔비엔푸 전투이다.
디엔비엔푸는 하노이 서쪽 300km 떨어진 라오스와의 국경지역, 고원지대에 위치한 마을로서 비엔 민의 라오스 물자 공급 루트의 핵심에 위치해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프랑스 정예 외인부대를 중심으로 한 1만 6천여 명의 정예군을 공수시켜 점령하고, 2개의 활주로(airstrip)와 주변에 여러 개의 진지를(base) 구성하여 요세화 하는 작전을 1953년 11월 전격적으로 실시한다.
디엔비엔푸 점령과 요세화(stronghold)는 비엔 민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도발로 간주되어 약 5만 명의 병력과 200문의 곡사포(howitzer), 80여 문의 고사포(flak), 다수의 박격포(mortar)를 인력으로 디엔비엔푸로 이동시킨다. 프랑스의 기본 작전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건설하고 비엔 민 정규군을 유인하여 우세한 공군력과 화력으로 적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로의 공산 세력 확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엔 민의 산길을 개척하고 위장을 통한 대규모 화력의 이동에 대하여서는 공중 정찰 및 폭격으로 완전 차단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엔 민의 보급 루트를 전혀 차단하지 못했고 야간 이동과 위장(camouflage)한 무기와 인력은 1954년 2월 말 까지 디엔비엔푸 주변 산지에 모두 도착하여 공격 준비를 마쳤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의 치명적인 실수는 주변 산지 가운데 비행장과 요새를 구축하면서 산악 지역으로 확장한 진지를 전혀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군은 1954년 3월까지 간간히 가해지는 포격에도 몇십 문 정도의 적 포가 있다고 예상했지 200여 문의 포대는 공군 폭격하에서는 도착할 수 없다는 맹신을 하고 있었다.
이 보급 루트, 디엔비엔푸 루트를 입안 기획한 장군이 보 능우엔 지압 (한자 이름: 무원갑) 장군이다. 300km가 넘는 이 루트를 개척하고 절대적인 프랑스 공군의 폭격에도 5만의 군인과 300여 문의 화포를 무사히 이동시킨 지압 장군의 이 전술은 이후 미국과의 전투에서도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과하는 "호치민 트레일"(Ho Chi Minh Trail)을 완성하고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는 원동력이 된다.
무원갑 장군은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군인이 아니고 고등학교 역사 선생으로 재직하다가, 호치민의 독립사상에 감명받아 독립 전선에 참여한 세계 전사에서 보기 드문 장군이다. 소련에도 이런 장군이 몇 명 있었지만 무원갑 장군처럼 최고 사령관을 차지한 장군은 아니었다.
무원갑 장군은 특히 "손자병법"과 "전쟁론"을 즐겨 읽었으며, hit and run방식의 게릴라전과 "성동격서"를 주요 전략으로 구사하여 프랑스군과 미국군을 퇴폐시키고 베트남을 통일시킨 베트남 전쟁의 영웅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비엔 민군은 디엔비엔푸 활주로 외곽의 기지들부터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한다. 전투의 시작은 프랑스군이 생각지도 못했던 200여 문의 소련제 75mm 곡사포 포격(bombardment)으로 적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조국 독립이라는 목표 하에 최고의 사기(morale)를 가진 보병들의 돌격으로 진행되자 용병으로 구성된 프랑스 부대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300여 대의 항공기를 가지고 적진을 폭격했지만 위장한 적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았고 포대는 벙커를 만들어 폭격의 피해를 최소화하였으며 80여 문의 고사포(anti aircraft gun)의 집중포화에 적절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굳건한 믿음이었던 공군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전세는 점점 불리해져 갔다. 한편 전체적인 무기면에서 열세인 비엔 민군의 사상자 수는 프랑스군의 2배에 달해 무원갑 장군도 이런 돌격작전을 계속 진행할 수가 없었다. 보 능우엔 지압 장군은 5월이 되면서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여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한 번의 결정타로 적을 격멸시키는 필승의 작전을 구사한다. 바로 "땅굴 작전"이다.
3월 후반부터 4월 말까지 디엔비엔푸 프랑스군 주요 진지 근처까지 땅굴을(tunnel) 파서, 포격 후 돌격하는 거리를 최소화하는 전술을 구사하자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은 항복하게 된다.
보 능우엔 지압의 뛰어난 점은 현대 전투에서 제공권이 전무한 전쟁을 치르면서 아군의 포대를 보호하는 벙커 포대를 야산에 구축하고 근접 돌격에서 희생을 최소로 하는 땅굴 전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장본인이다는 것이다. 지압 장군은 또 하늘의 복을 받아서인지 104세까지 장수하였다.
영어공부 합시다.
1. trail
"자국, 흔적, 오솔길"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track"과 유사한 의미인데 길을 지나가는 바퀴 자국의 의미에서 확장되어졌다. 바퀴가 계속 지나가면 새로운 길, 도로가 생긴다.
2. stronghold
"요새"라는 의미이다. 요새로 더 많이 언급되는 단어, fortress와 동일한 의미이다. "strong"은 강력한, "hold"는 붙잡다. 강력하게 붙잡고 있는 곳 "요새"이다
3. enclave
'소수민족 거주지, 타국 영토 내의 자국 영토"의 의미이다. 이 단어 암기 시 "enclose"(둘러싸다)는 단어를 연상하면 좋을 듯하다. 둘러 싸인 지역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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