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분단

 

베트남 전쟁 블로그를 준비하면서, 베트남의 분단과 공산화 과정 중 우리나라와 비슷한 부분이 매우 많아 6.25 한국 전쟁과 한반도 분단의 재조명 블로그 작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도시를 폐허화(devastate) 시키고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일본 군부는 천황의 안위 등을 조건으로 걸면서 미군에게 항복협상을 제의하였다. 미군은 8월 9일 나가사키에 또 한 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며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자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 14일 무조건적인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발표한다.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의 항복이 곧 이루어질 것을 안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소련 극동군을 투입한다. 8월 11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주둔  태평양 함대와 함께 소련 25군이 청진, 나남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8월 20일 일본군 사령부를 점령한다.

만주에 주둔해 있던 관동군과 일본인들의 피난민이 청진과, 부산으로 몰려들고 원폭 투하 소식을 접한 조선 총독, 아베 노보유키는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해 조선 주둔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들의 안전한 본국 송환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 내 정치 집단과 만남을 갖는데 이때 만난 사람이 여운형이다.

여운형 과 김구

당시 한반도의 지식인 집단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자 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조직이 여운형이 1944년 비밀리에 조직한 조선 건국동맹이다 (베트남 호찌민이 조직한 베트남 독립동맹과 이름까지도 유사합니다). 조선 건국동맹의 주요 구성원은 공산주의자 이강국,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자 출신 조동호, 신간회 좌익 계열 박상희(박정희 대통령 형), 황태성, 목포 지부장 김대중(이후 대통령)등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 총독과의 회담으로 1945년 8월 9일부터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여 전국 면 단위까지 치안, 행정 업무 접수에 들어가게 된다.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우익계열, 송진우, 김병로, 이인 등에게 동참을 요구했지만 거절 또는 대립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조선 공산당 박헌영의 참가로 건준은 공산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게 되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재미 독립협회 이승만 등의 세력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정통성이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건준은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더 이상 좌. 우 합작 연합정치집단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해방 후, 한반도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나누어져 분단되는 과정은 국내의 좌. 우익의 노선투쟁으로 발생한 것뿐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들의 체제 확산 세계화 전략의 결과였다.

소련군은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 이후, 파죽지세로 원산, 평양을 점령하고 9월 초 개성까지 점령하자, 서울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제17방면군 사령관 요시오 고즈키 중장은 일본 동경에 위치한 맥아더 사령부에 긴급 타전을 한다. "조선 주둔군의 무장해제(disarming)를 위한 미군의 조속한 서울 진입이 요구된다." 이 소식을 접한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 24 군단장 존 리드 하지 중장을 9월 7일 인천으로 급파하여 9월 9일 서울에서 일본군 제17방면군의 항복을 정식으로 받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선언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고, 미 제24군이 한국을 점령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선언하고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에게 행정권을 이관하기 까지 군정을 실시했다. 

미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
이승만 대통령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북조선 김일성과 공산주의 정권은 남쪽의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 공산당과 연합하여 주요 정치인 테러, 암살을 통하여 송진우, 여운형, 김구 등 많은 사람이 암살(assasination) 하였고, 용산 철도청 파업, 정판사 위폐사건, 대구 사태(박상희 사망), 4.3 제주 사태, 여수, 순천 국군 항명 사태 등 많은 공산 혁명활동을 진행하였지만 남한의 공산화에는 실패하게 된다.(베트남은 성공적으로 남 베트남내에 민족 해방전선을 구축하였다) 특히 1949년 모택동이 중국 본토를 공산화시킨 이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차례로 공산화시켰지만 철의 장막(iron curtain)에서 죽의 장막(Bamboo curtain)까지, 동유럽, 아시아 국가의 공산혁명을 직, 간접으로 지원한 국가들 중 실패한 유일한 국가가 대한민국입니다.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도 미국과의 회담을 통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하면서 북조선 내부의 조만식 등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선언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고 소련의 공산주의 이론을 북조선에서 실현할 수 있는 친소파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노동당 정권에게 정권을 이양함으로써 남과 북에는 서로 다른 이념의 정권이 각각 집권하게 된다.

북조선 김일성

38도선 이북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김정은이 할아버지)은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로 북한 대중 앞에 나타나자 북한 대중이 생각한 백발의 노련한 독립 운동가 김일성 장군과는 너무 차이 나는 33세의 애송이 김일성을 보고 가짜 김일성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런 북한 내 기반이 전혀 없었던 김일성이 북한 내 지도자로 선택된 것은 소련 스탈린의 유명한 말 "소련의 빵을 먹어본 인물이 북한을 통치해야 된다."에서 보듯이 전적으로 소련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동독에서 북한까지 공산세력 최대 영토

38도선 이남에서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 여러 인물이 경쟁을 하였다. 그중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하였고 상해 임시정부 통령도 역임하면서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많이 받는 인물로서 1948년 실시한 대한민국 최초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물론 미국의 입장에서도 가장 미국을 잘 아는 인물인 이승만 정부가 남한에서 합법적인 정권으로 탄생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운형, 김구, 김규식 등 반대 진영의 견제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의 탄생은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승만 박사(프린스턴 Ph.D)는 지난 40여 년간의 독립 투쟁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허구성과 종파 성을 많이 경험하였고. 이차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체제의 갈등을 간파하여 미국 중심의 통일 한국을 만들어야 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김구, 김규식은 독립 운동가로서는 적합하였을지 몰라도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가로서는 세계의 흐름을 너무도 몰랐다. 그들의 바람처럼 남한 단독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김일성, 박헌영과의 남. 북 공동 선거를 위하여 몇 년을 협상으로 보냈다면 대한민국은 탄생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영어공부 합시다!

 

1. Iron/bamboo curtain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연설에서 유래된 "철의 장막"이라는 단어이다. 소련의 스탈린(강철이라는 의미)의 이르에서 유래된 동유럽 소련 위성국들의 경계를 의미하며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중국과 그 위성국들을 합쳐 "죽의 장막"(bamboo curtain)이라는 단어도 이후 사용된다.

2. unconditional

"무 조건"이라는 의미이다. 부정 접두사 un-이 들어간 대표적 단어. 전쟁에서 항복할 때 패배자의 요구 사항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때 많이 사용한다.

3. Ph. D.

박사 학위라는 의미이다. Doctor of Philosophy의 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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