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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7 베트남 전쟁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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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의 진실
미국의 전략적 실수
1954년 제네바 회담의 결과에 따라 북위 17도 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진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의 이념적 갈등의 최 전선이었다. 미국은 남 베트남이 공산화된다면 이웃 국가들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멀리 호주까지도 연속적으로 공산화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을 신봉하였고 이런 공산주의의 파급은 반드시 막아야 하는 당면 목표가 되었다. 남 베트남은 목표 달성을 위한 최 전선이었다. 1961년 미국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케네디 대통령은 남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막대한 군사, 경제 원조를-10억 달러 이상- 지원한다.
특히 200,000명의 남 베트남 군 양성을 위하여 200여 대의 헬기 및 항공기를 지원하고 900여 명의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적극 협조하였다. 남 베트남의 딘지엠 정권은 오히려 이런 구호물자를 가지고 몇몇 인척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였고 절대다수 국민은 궁핍한 생활을 이어 갔다. 군부 역시 유능한 장교들이 승진하여 장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권과 연결된 일부 세력들이 군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면서 군인에게 지급되는 피복과 식량 심지어 미군의 무기들까지 빼돌려 베트콩에게 팔아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상황에서 굶주린 병사들(underfed soldiers)은 탈영(desertion)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대통령부터 일반 사병까지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아귀다툼을 하는 국가였다. 이런 정권에 비하여 북 베트남의 호찌민은 프랑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보 능우엔 지압 장군 같은 능력 있는 자를 군 사령관으로 발탁, 지지를 보내고 이런 지지 속에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서 북부 베트남의 주석으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였다.
북부 베트남뿐 아니라, 남부 베트남의 일반 대중들도 호찌민을 민족의 지도자라고 찬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버린 것은 미국의 큰 실패의 근원이 되었다. 심리 전에서 벌써 남부의 부패한 지도자 따르지 않는 베트남 전쟁은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였다.
1958년 이후 북부 베트남의 대남 공작은 강화된다. 1961년 N.L.F(National Liberation Front: 민족 해방 전선)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17,000여 명의 게릴라들이 활동하였지만 1964년 더 많은 남부 베트남 사람들이 동참하여 전국 14개 지부를 갖춘 200,000여 명의 군사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1964년부터 미국은 남부 베트남 군 단독으로는 베트콩 세력을 막아 낼 수 없다는 판단하에 미국 전투병력을 투입 하기 시작한다.
미국 제36대 대통령이 된 존슨 대통령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우방국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여기에 호응하여 "공산당"과 직접적인 전투 경험을 갖춘 우리나라 청룡, 맹호부대들이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파병하게 된다.
1964년 남부 베트남내의 200,000여만 명의 베트콩 총사령부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총사령부에는 주요 인력 들만 해도 3만 6천여 명이 거주하는 대단위 시설인데, 미군 정보대는 캄보디아 국경 밀림 지역이나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 지역일 것이라고 여러 첩보 등을 통하여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이 지역은 군사 훈련 캠프가 있었다) 전쟁 후 실질적인 사령부는 남부 수도 사이공 서북쪽 32km 밀림 지역, 일명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수도 바로 옆에 게릴라 총본부가 감시를 피하여 존재할 수 있었는가? 적이 코앞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1. 사이공을 제외한 외곽지역 주민은 모두 심정적으로 베트콩을 지지하고 있었다.
2.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게릴라 전술에 따라 수백 km의 땅굴을 마치 미로(maze)처럼 연결하여 미군의 공습과 도심 게릴라 전을 준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3. 일단 유사시 war zone C, D지역으로 땅굴 이동이 가능하여 감시, 정찰을 회피할 수 있는 장소이다.
4. 수도 사이공의 게릴라 인력 확보가 용이하고, 캄보디아 국경지대를 통한 북 베트남의 무기 및 여러 가지 보급이 용이하다.
1973년 미군들이 철수할 때까지 한 번도 베트콩 지도부를 파괴하지 못하고, 역으로 1968년 구정을 기하여 사이공을 중심으로 전국 100여 개 도시를 기습 공격하는 중심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사이공에는 6만여 명의 베트콩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할 정도로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후 미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게릴라들에 의해 미국 대사관이 점령되는 것을 본 미국은 "이런 무법 게릴라들이 수도까지 농락하는 나라를 왜 우리가 지켜야 되는가!"라는 반전 시민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여론은 미군 철수 쪽으로 기우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 사진은 미국의 반전데모의 계기가 된 AP 기자가 촬영한 유명한 구정 공세의 한 장면이다. 권총으로 베트콩을 사살하는 사람은 국가 경찰국장이고 민간인 복장을 한 처형된 사람은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베트콩 대위 응우엔 반렙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당시 기자는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의심하여 거리에서 즉결 처형하였다고 베트남 정부의 무법 성을 폭로한다면서 대서특필하여 타임지에 실린 유명한 사진이다. 하지만 이 민간인은 베트콩 핵심 세력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가장 큰 실수는:
1. 베트남 인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개인의 정치적 야욕에 가득 찬 딘지엠 정권을 지지하고 이후 군사 쿠데타 세력 역시 호찌민 같은 대중적 지지와는 거리가 먼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다.
2. 정확한 적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베트콩 총본부조차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알지 못하였으니 어디로, 어느 정도 규모의 적을 공격해야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를 전선 없는 전쟁 또는 Area War(지역 전투)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콩은 항상 미군을 필요한 시간에 자신들의 매복 지역으로 끌어들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3. 베트콩은 원하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여 전투를 진행하였지만, 화력과 지원 포격이 확실한 미군이 1:5 정도의 사상자 비율로 항상 우세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매복 공격으로 시작하는 베트콩의 기습에 미군의 사상자가 항상 먼저 발생하고 미국의 메스 미디어들은 유혈이 낭자한 미군의 총상자들을 미국 텔레비전에 그대로 방송하니, 이를 본 미국민들은 "남의 나라를 위해 왜 미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야 하나!'는 반전의 분위기만 고조시켰다. 베트남 전쟁은 "미디어 전쟁"의 시작이었다.
영어공부 합시다.
1. underfed
"영양부족의, 음식이 부족한"의 의미이다. 이 단어의 구성을 보면, "under"는 아래, 이하라는 의미이고, "fed"는 "feed"의 파생형. 즉 음식을 먹이는 것을 기준 이하로 하는 것이니 부족하다는 의미 유출이 가능하다
2.undeclare
"선언하지 않은, 선포하지 않은"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성이 간단하다. "declare"는 "선언하다"이다. 접두사 "un"은 부정의 접두사. 이 둘을 합치면 된다.
3. resounding
"울러 퍼지다, 확실하다"의 의미이다. "sound"는 소리가 울리다, 소리를 내다는 의미이다. "re"라는 접두사는 다시, 반복적인 의미가 있으니 소리가 돌고 돌아 나온다. 널리 퍼지 다는 의미가 되고 널리 퍼진 소리는 확실해진다. 이런 연결이면 충분. resounding은 형용사로 "확실한"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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