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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30 히틀러 vs 스탈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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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vs 스탈린
히틀러와 스탈린의 대결전
1941년 12월, 히틀러의 소련 정복 계획이 완전히 괘도를 이탈하였다.
모스크바 19km 앞에서, 소련의 동장군을 만난 독일군 장군들은 히틀러에게
전열의 재정비를 위한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히틀러는 완강히 거부하고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동장군도 히틀러의 적이었지만, 무서운 적들이 나타난 것을 히틀러는 몰랐다.
스탈린은 독일의 파죽지세 공세에 어찌할 봐를 모르고 있을 때, 그에게 "신의 선물"이
도착한다. 일본 도쿄에 있는 스파이-"조르게"로부터 중요한 첩보 내용이 도착한다.
조르게는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군인으로 자원입대하여 철십자 훈장까지 탄, 독일 입장에서 보면 독일 참전용사
였지만,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소련 첩보국 요원이 되어, 독일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며 첩보를 수집하다가, 이차대전 직전 일본 동경으로 잠입하여, 일본 내
최대의 스파이망을 구축하고, 여기서 정보를 수집하여 소련 첩보국에 보고 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데, "독일 참모부에서 건의한, 일본 관동군의 소련 시베리아 침공작전은
일본 내에서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모스크바가 함락되기 전에는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 중이며, 차후 동남아시아 점령을
제1의 목표로 정하고 계획을 수립한 상태임."이라는 첩보 내용이 스탈린에게 보고 되자,
스탈린은 즉시 주코프 장군 휘하의 극동 소련군 정예부대 33개 사단, 50만 명을
모스크바로 이동시키는 명령을 내린다. 이들은 추위에 익숙한, 훈련 잘 된 정예병이었다.
폭설이 그치자 이들은 독일 중부군을 정면으로 공격(assault)하며, 밀고 들어오자, 천하의 독일군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50~200km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히틀러는 전쟁을 실패로
만드는 최악의 실수(fiasco)를 저지른다.
그의 위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철수(withdrawal)한 구데리안 장군 및 35명의 주요 지휘관들(commander)을
해임(be sacked) 시켜버리고, 자신이 직접 육군 참모총장을 겸임하게 된다. 이전 프랑스 침략 작전 때 모든 장성들이 만든 "슐레펜 계획"을 35회나 수정하게 하고, 마침내, 대담한(audacious)한 그러나 적의 허를 찌르는 "낫질 작전"을 선택하고, 이를 입안한 "만슈타인 장군"과 "구데리안 장군"을 중용하여,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승리 후, 프랑스 수도 파리로 입성하여 여러 장군들을 내심 감탄하게 만든 그런 히틀러가 아니었다.
이제 파리에서 모스크바 앞까지 정복한 절대 독재자이며, 전략의 천재로 자부하는 과대 망상가, 히틀러만 남아 있었다. 모든 작전은 그의 육감에 의존하게(depend on his gut instinct) 된다.
1941년 겨울의 소련 대공세는 뛰어난 중부군의 방어적 공세(counter-offensive)에 막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양군은 봄을 기다리면서 겨울 휴식기에 들어간다.
1942년 봄이 되면서, 히틀러는 "바바로사 작전"의 핵심이었든 모스크바 공략 대신, 코커서스 지방의 유전 확보를 핵심으로 바꾼다. 남부군에 모든 지원을 집중하여 남부군을 2개의 집단군으로 나누어 A집단군(Army Group A)은 카스피해 유전을 점령하게 하고, B집단군(Army Group B)은 배후 지역인 볼가강 인근을 점령하게 한다.
이렇게 갑자기 남부지역으로 총공세를 하자, 모스크바 혈전을 준비 중이던 스탈린은 이런 엉뚱한 공세에 여러 달 고민을 했다고 한다. 왜?, 왜?, 왜? 모스크바가 아니고 남부지역이지? 이유는 간단하다. 히틀러는 상병으로 참여했던 전투 경험이 전부였기 때문에, 1941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반격(counter attack)을 당하여, 200km 후퇴를 하자, 이 전쟁은 장기전을 준비해야 된다는 생각에 빠지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의 필수 물자인 석유를 확보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다.
히틀러는 코커서스 지방까지 전선을 확대하면, 독일의 전선은 북쪽 레닌그라드에서 남부 이란 국경까지 3200km나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독일군 400만 명으로 이 긴 전선을 방어할 수 없고, 빈 공간이 너무 많이 생겨 반드시 역습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A 집단군의 코카서스 유전지대 점령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으나, B 집단군의 배후지역 확보를 위한 볼가강까지의 진격은 특정한 목표 없이 진행되었다. 특히, 볼가강 서쪽을 따라 길게 위치한(straggle),
스탈린그라드는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도시임에도, 히틀러는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이름을 가진 도시라는 이유로 B 집단군의 주력, 6군을 직접 도시로 진입하게 하였다. 혼돈스러운 히틀러의 진격을 바라보던 스탈린도 소련군 주력 부대 190만 명을 볼가강 동쪽에 집결시켜, 스탈린그라드의 수성과 반격작전을 진행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너무 유명한 전투라서 많은 분들이 익히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독일군 장교는 "매 걸음마다 전우의 시체를 밟고 전진하였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치열한 시가전을 치르며 독일군은 전진하였다. 8월에 시작된 전투는 3달 동안 이 좁은 도시 안에서 뺏고, 뺏기는 아비규환의 전쟁터였다.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 강력 추천) 11월에는 B 집단군은 볼가강 서쪽을 모두 점령한 상태에서, 주력 병력을 총집결하여 6군의 총병력이 30만 명에 이르렀다.
1942년 11월 중순에 드디어 스탈린그라드를 90% 점령하고 볼가강 서쪽 둑에 도달하게 된다. 당시 볼가강을 따라 형성된 B 집단군의 전선은 200km가 넘는 지역이었는데, 스탈린그라드에 주력 독일군 30만 명이 투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머지 지역은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군이 주로 맡고 있었다. 이들은 독일군에 비해 전투력이 많이 떨어졌고, 방어하는 지역도 너무 길어, 방어 병력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소련군 지휘관 쥬코프는 3달간의 스탈린그라드에 병력을 공급하면서 독일군과의 정면 전투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역으로 독일군이 잘 사용하는 측면 돌파, 포위(Pincer and Claw) 작전을 시행하기로 한다.
11월 19일 소련군 사령관, 쥬코프는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남쪽 전선을 맡고 있던 루마니아군을 공격하여 11월 23일 스탈린그라드 배후를 차단해 버린다.(encircled the Stalingrad)
독일 6군, 30만 명이 고립되어 버렸다. 이미 루마니아군 장군들의 지원 병력 요청과 독일 참모부의 소련군 역습 위험성을 묵살하고, 스탈린그라드에만 집착한 히틀러의 근시안적 작전계획의 결과였다.
스탈린은 인해전술을 사용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수성 작전을 펼쳤지만, 승리할 수 있는 쥬코프의 측면 돌파 작전을 승인하였다. 반면, 히틀러는 자신이 좋아하는 바그너의 서사시적 오페라처럼, 갑자기 기사도(chivarly)적인 1:1 맞대결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대패를 하게 되었다. 또한, 고립된 6군을 구출하기 위해 돈 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 장군이 직접 지휘하여 소련군의 포위를 뚫고, 스탈린그라드 50km까지 진출하여, 6군의 스탈린그라드 내부에서의 집중된 탈출 작전을 요구하였지만, 6군의 파울루스 장군은 "총통의 허락이 있어야 탈출 작전이 가능하다"며 히틀러에게 6군 탈출 작전의 허락(permission)을 구하였으나, 히틀러는 "위치 사수"명령을 내리고, 파울루스 장군을 원수(marshal)로 승진시키는 미친 짓을 한다.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독일군은 소련군의 항복 권유에도 3달간 끝까지 항전하다가, 1943년 2월 2일에 파울루스가 직접 항복한다.
파울루스 원수와 9만 1천 명의 병사들이 항복 함으로써, 막강하던 독일 6군, 30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키면서 항복보다는 자살과 결사항전을 유도했지만, 파울루스는 "내가 왜 육군 상병을 위해 자살을 해야 하냐?"면서 항복을 선택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선전을 위하여 30만 명의 목숨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다. 하지만 6군의 전멸 소식은 전염병처럼 전 전선의 병사들에게 퍼져, 총통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전쟁 결의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늘을 찌르던 사기와, 세계 최고의 탱크, 병사, 장군들을 가졌던 독일군은 옛날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게 된다.
영어 공부합시다.
1. assault
"공격"의 의미이다. 공격은 또 다른 단어 "attack"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 둘의 차이는, attack은 자주, 일상적인 전투에서의 공격을 의미하고, assault는 대대적인 큰 공세에서의 공격을 의미한다. 일상에서는 큰 차이
없이 혼용한다.
2. fiasco
"실패, 실수"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이태리어 "유리병'에서 전래된 단어이다. 유리병 제작에서 조금의 방심을 해도 실패한 유리병이 나오는데서 유래되었다. 암기 시, co는 코크병, fi는 실패(fail)를 연상하면 좋을 듯합니다.
3. sack
"해임하다'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sec-에서 왔는데, 감싸다, 즉 자신의 역량을 감추어 버리다. 직위에서 해임하다로 연결 가능합니다.
4. straggle
이 단어는 상당히 많은 의미가 있다. 뒤쳐지다, 뿔뿔이 흩어지다, 산재하다 등, 여기서는 펼쳐져 있다는 의미로 사용됨. spread와 같은 의미로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5. chivalry
"기사도, 기사들"의 의미이다. 단어 암기 시, 기병들(대), cavalry를 생각해보자. cavalry들은 항상 기사도(chivalry)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연상하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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